고난 속에서 찾아낸 경이로움
예전에, 시골에 있는 오래된 복지 시설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쥐가 나오기도 했던 곳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도시에서는 보통 볼 일이 없는 쥐가 아주 신기했었다. 특히, 그 자그마하고 하찮게 작은 존재가 나를 보자마자 도망치지 않고 가만히 보고 있다가 내가 움직이니까 그제야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건가...라는 의문을 품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서 의도치는 않았지만 그때의 그 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게임을 하는 동안 나는 생쥐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당신은 하나의 야생동물로 만들어버리는 게임, 오늘 소개할 『Rain World』 다.
제작: Videocult
장르:생존, 오픈월드, 플랫포머
한글패치:O(공식지원)
플레이타임:내 기준 약 24시간(처음으로 엔딩을 볼때까지)
스팀평가:매우 긍정적(20,703개의 평가 2024년 1월 30일 기준)
가격:본편 27000원, DLC 16500원
소개 및 소감
Rain World는 슬러그캣이라고 하는 달팽이와 고양이를 섞은듯한 작고 하찮은 존재가 되어 세계를 탐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세계는 곳곳에 문명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 수시로 질량에 압사당할듯한 비가 내리는 데다가 도처에는 슬러그캣을 노리는 위험한 생물들과 지형이 깔려있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고른 슬러그캣의 이야기에 따라 이 잔혹한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내가 플레이한 '생존자'(제일 처음에는 수도승과 생존자 밖에 고를 수 없다.)는 무리에서 낙오되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를 안내하는듯한 작은 벌레를 따라 여정을 떠나게 된다.
게임 시스템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앞서 말한 비 때문에 주기적으로 우리는 '피난처'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피난처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 시간을 버틸 식량이 필요하다.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위험요소들을 피하거나 맞서 싸우거나 적절히 대응하면서 식량을 모아 탐사하다가 피난처로 도망치는 플레이가 주가 된다. 기존의 생존게임들처럼 재료를 모아 무기를 만들고 특정한 레시피를 모으고... 그런 요소는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무기조차도 1회용인데 길 가다가 주워서 써야 한다!
게다가 설명이라고는 가끔 죽었을 때 나오는 팁 말고는 먹기, 줍기, 점프, 투척... 그런 것 밖에 알려주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게임은 외적인 단계에서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나는 게임이 끝나고 정보를 찾아보고 나서야 아니 이런 조작법도 있었어??라고 깨달은 것도 몇 개나 된다.
이런 가혹한 환경, 불친절한 설명이 겹쳐져 게임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게 어렵게 느껴지는 수준이다. 그러니까, 화가 나게 만든다. 게다가 게임의 수려한 아트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음울함과 지형지물로 위장한 적대적인 생물들에 몇 번이나 죽어보면 게임 속 세상 전체가 두렵게 느껴진다. 모든 것이 낯선 이 세계에서 우리는 한 없이 이방인이다. 그러나 이 외롭고 위험한 모든 순간을 견뎌내면서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은 우리를 진짜 '슬러그캣'으로 만들어버린다.
내가 슬러그캣이 되어버린 경험을 돌이켜보자면... 이 게임은 계속해서 피난처에 들어가 버텨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식량'이 가장 중요하다. 눈치채보면 어느 순간부터 나는 모르는 물건, 시체, 상호작용할 수 있는 무언가가 손에 쥐어지면 일단 먹을 수 있는지부터 체크하고 있더라.
여타 일반적인 게임처럼 위험 요소를 죽어가면서 대응하다가는 '카르마'라고 하는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필요한 수치가 너무 떨어지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죽음을 최대한 회피하고 모르는 생물이 있다면 납작 엎드려서 가만히 자극하지 않고 나를 공격하는지 안 하는지부터 살펴보거나 조그마한 생물들을 던져서 위험도를 체크하게 된다. 심지어는 죽은 줄 알았던 포식자가 죽은 척을 하고 있다가 다가온 나를 물어 죽이는 경우도 있었기에 나중에 가면 확인사살은 기본이 된다.
게다가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만큼 자원을 피난처에 모아두는 습성도 어느 순간부터 생겨났다. 특히 색깔이 특이한 진주가 있길래 신기해서 피난처에 모아 둔 건 뭐랄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까마귀 같았다.
이런 체득 과정들을 거치게 되면서 게임은 놀라운 몰입감을 선사한다. Rain World의 세계는 사실 시뮬레이션 장르에 가깝도록 하나의 퍼즐이나 정교한 기계장치처럼 잘 짜여있기에 정말로 이 세계를 거닐고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몰입감을 통해 우리는 깊은 감정들을 선물 받는다. 우리는 정말 하찮은 존재가 되었기에 이 모든 것이 위험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알지만 어째서 생겨났는지는 잘 모른다. 사실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그러나 '스포일러'를 만나며 세계에 대해 더 알게 되는 순간, 생존을 넘어 그 너머... 비밀을 밝혀내고 지식을 쌓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손으로 말이다. 무척이나 우아한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가장 감명 깊게 느껴졌던 부분은 스토리텔링보다도 게임에 있는 숨겨진 요소에 대해 깨달았을 때였다. 나는 게임의 2/3 정도를 '도마뱀'이라는 포식자를 무조건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녀석들을 보면 항상 도망치다가 스스로 싸울만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웬만하면 반드시 죽여버리고 넘어가고는 했다. 반쯤은 원한이라고 봐도 좋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내가 돌멩이를 주으려고 들고 있던 사냥한 벌레를 내려놨더니 녀석이 그걸 채가고 돌아가더라. 눈앞에서 먹이를 빼앗긴 나는 허망하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웬일인가, 먹이를 먹은 녀석이 나를... 적대하지 않는다!
밀고 밟고 비비적거려도 입 한 번 안 벌린다. 그 순간 어떻게 된 건지 깨달은 나는 스스로의 무지함에 통탄했다. '나를 적대하니까 무조건 싸워야 해'라는 사고에 갇혀서 다른 가능성은 생각도 못해본 것이다. 그 후 나는 도마뱀들과 친해지는 데에 주력했다. 이 경험은... 게임에서 풍기는 기이한 외로움을 싹 날려 보내준데 더불어 후반부 지역에서 나를 정말 많이 도와줬다. 도마뱀들에게 잘 대해주면 걔들도 나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고는 한다. 도와주기도 하고. 그들이 없었다면 엔딩까지 10시간은 더 걸렸을 거다.
어떤 순간에는 숨겨진 고대의 존재 같은 것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 순간에는 순수하게 그 거대한 존재감과 신비로움 앞에서 경이감을 느꼈다.
가볍게 추천하기에는, 또 가볍게 하기에는 너무 하드 한 게임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휴가, 방학 등 시간과 마음이 여유롭다면 한 번쯤 해보는 게 어떨까. 본인이 게임에서의 고난을 즐긴다면 더더욱 말이다. 이 끝없는 비가 내리는 세계에서의 여정은 분명히 당신의 마음속에도 큰 발자국을 남길 것이라고 확신한다.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뷰]캐릭터에 액션까지 챙겼다, 그랑블루 판타지:Relink (1) | 2024.02.21 |
---|---|
[리뷰]여주인공이 가끔 제일 무서운 로맨스, 메리의 불타는 행복회로 (1) | 2024.02.06 |
[리뷰]소원을 빌었더니 개판이 났어요!, 별에게 소원을 (3) | 2024.01.26 |
[리뷰]광기의 잔혹동화, 백야기담 (1) | 2024.01.23 |
[리뷰]예쁜 픽셀 메트로베니아, Momodora: Moonlit Farewell (2) | 2024.01.19 |